[스크랩] 조선왕조실록- 세계 정상의 한국 문화유산 (7)
조선왕조실록
- 세계 정상의 한국 문화유산 (7) -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첫 번째 임금인 태조 이성계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
날 수로는 172,280 여 일의 역사를
총 1893권에 담은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역사서이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주도로 편찬되어
역사적 왜곡이 심한 마지막 두 왕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왕조역사기록들이 모두 필사본인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단 몇 부를 발행하면서도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이와 같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뛰어난 역사의식과 기록문화를 담고 있는『조선왕조실록』은
일찍부터 문화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선정되었다.
실록은 사관들이 왕의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사실을 꼼꼼히 기록해두었다가
왕의 사후에 편년체로 편찬한 공식적인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
조선시대 왕들의 사후에 만들어진 실록을
총칭하여 부르는 것이다.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궁중의 사관들은
매일 붓을 들고 왕을 따라 다니면서
왕의 말과 행동, 왕과 대신들 간의 대화,
조회와 회의 내용, 국가의 중대사를
속필로 낱낱이 기록했다.
조정의 관료라고 해서 모두
국왕이 참석하는 정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임의 종류와 신하들의 관품에 따라
참석 여부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사관은 관품에 상관없이
국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들어가서
국정 논의를 기록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사관의 위상이었다.
이 때 사관에게는 직필이 생명이었다.
국왕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공정하게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의 기초 사료 작성에서부터
실제 편술까지에 직접 참여했던 사관은
기술에 대한 독립성과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이와 같이 사관에게 주어진 임무가 막중했으므로
젊고 유능한 관료만이 전임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 할 수 있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라야 했다.
인조대 무인년간의 사초(仁祖戊寅史草).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사관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그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1404년(태종 4년) 태종은 사냥을 나갔다가
실수로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다.
무안해진 태종은 좌우를 둘러보며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당시 사관은 왕이 말에서 떨어진 일은 물론,
이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까지도
그대로 기록하고 말았다.
왕의 언행이 이렇게 낱낱이 기록되고 남겨져
후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는 사실은
왕으로 하여금 역사들 두렵게 생각하고
독단적인 치세를 막는 장치가 되었다.
왕의 사후에 사관들은
매일 기록한 사초(史草, 실록의 기초자료)와
주요기관의 일지,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로 인쇄될 공식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후대에까지 잘 보존되도록
네 부가 만들어졌는데,
이 중 한 부는 서울의 춘추관 사고에,
나머지 세 부는 성주, 충주, 전주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만약 한 두 개의 실록이 자연재해 등으로 소실되더라도
나머지 사고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으로
다시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방법은 매우 안전한 것으로 믿어졌다.
그런데 임진왜란(1592-1598) 기간 중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이면서
네 개의 사고 모두가 한꺼번에 소실될 위기에 처해졌다.
1592년 6월, 서울, 성주, 충주의 사고가
이미 적들의 방화로 불타 없어져 버렸고,
왜군 제6진이 성주, 선산,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만약 전주 사고의 실록마저 소실되어 버린다면
조선 역사의 반 토막은 영원히 묻혀버리고 말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왜군의 습격을 받기 전에
안의와 손홍록 두 선비가 사재를 털어
수십 마리의 말과 인력을 구해
실록을 싣고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겨
마지막 남은 실록이 무사할 수 있었다.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수호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불침번을 섰고,
전황에 따라 내장산을 떠나
충남 아산과 마니산, 묘향산 등
여러 임시 거처를 거쳐 강화도에 안치되기까지
실록과 함께 10년 동안 무려 2,000리나 이동했다.
이 두 선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선 전기 200 년 동안의 소중한 기록이
참화로부터 지켜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은 남아 있는 실록으로
네 부를 다시 인쇄하는 한편,
서울의 춘추관 외에 이제는
아예 사고를 깊은 산중에다 설치하게 되었다.
즉, 춘추관에 보관하는 한 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적상산),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과 같은
깊은 산중에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되었는데,
이는 임란 중에 내장산에 보관하던 것에
착안하여 얻은 보존 방법이었다.
실록 편찬의 목적은
후대에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왜곡되지 않은 공정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이를 위해 사관 외에는 아무도 사초나 실록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왕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국왕의 권한이 강했던 중국의 경우
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실록을 보는 일이 많았다.
왕이 실록을 보았기 때문에 중국의 실록은 기록이 부실해졌다.
후환이 두려운 사관은 왕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기록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직필이 아닌 곡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의 경우에는
임금도 실록을 볼 수 없다는 원칙이
거의 완벽하게 지켜졌다.
국왕이나 대신들도 사사로이 열람할 수 없었으며
오직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로만 활용되었다.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실록을 열람할 필요가 있을 때는
특별히 사관을 사고에 파견하여
현안과 관련된 부분만을 등사하여 오도록 하였다.
또한 새로운 실록을 사고에 봉안할 때나,
정기적으로 사고를 통풍시키고 청소할 때에도
반드시 춘추관의 사관들이 배석하여야 했다.
만약에 있을지 모를 도난과 분실,
또는 기록의 훼손을 막기 위함이었다.
실록은 당대 정치의 잘잘못과 왕과 신하들의 인물비평까지
가감 없이 기록한 것이므로,
그 편찬과 관리가 이처럼 엄격하였다.
<전주사고>
실록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록의 방대함과 정확성,
내용의 다양성과 포괄성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할만한 실록은 없다.
일본의 경우 10세기 이전의
몇몇 왕의 치세를 기록한 실록이 있을 뿐이며
베트남의 경우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0년 간 기록한 『대남식록』뿐이다.
중국의 경우도 청나라와 명나라의 실록이
각각 260년, 296년의 기록을 담고 있지만
이 역시 472년간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여러 실록 중 여러모로
『조선왕조실록』과 시기와 편찬 체계가 가장 근접하여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명실록』이다.
그러나 『명실록』은
명나라의 모든 기간에 걸쳐 기록된 것이 아니라
16 황제의 치세 중 13 황제의 치세만 기록되었다.
글자 수를 비교해 보면
『명실록』은 1600만 자에 불과하나
『조선왕조실록』은 그 3배에 달하는
4700만 자로 이루어져 있다.
『명실록』과『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에서
공통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과 명
두 나라의 교류에 대한 내용을 직접 비교해 보아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훨씬 다양하고 상세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양국의 외교사에 대해
『명실록』에 있는 모든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또 하나의 특수성은
대규모의 번역 사업과 전산화 과정을 통해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 기록보다
철저하게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원문이 한문으로 쓰여 있어서
일반 대중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대중화를 위해서 우선
어려운 한문을 읽기 쉬운 한글로 바꿔야 했지만,
어려운 전문 용어가 많아 번역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 동안 남북한에서 모두 번역이 이루어졌는데
북한에서 20여 년, 한국에서 근 25년이 걸린 것은
이러한 난관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국역작업의 완료(북한 1991년, 남한 1993년 완료)는
한문으로 된 원전에 접근하지 못했던
다른 분야의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보다 쉽게 『조선왕조실록』을 열어 준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방대한 자료를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1995년 『조선왕조실록』이 CD로 제작 되었고,
2005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를 통해서도
원문과 국문 실록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학자들에게는 자국의 방대한 역사기록을
개인의 서재에서 마음껏 읽고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
꿈같은 이야기로만 들릴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역사 전공자는 물론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조선왕조실록』을
자유롭게 열람하고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다가갈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에 관한 책들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끊임없이 제작되어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것도
조상들의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기록 정신과,
또 현대의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실록의 대중화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실록은
단지 과거의 유산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한국과 세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대단히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유산인 것이다.